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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소란스러운 그림 아래, 토끼 2마리
예수가 팔을 들자 사람들이 몸을 피합니다. 그런데 화면 오른쪽 아래에는 이 소동과 동떨어져 보이는 작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토끼 2마리입니다. 은빛 그릇 가까이에 코를 대고 있습니다. 조금 옆에는 다리가 묶인 어린양도 보입니다. [1]

왼쪽 아래의 새장, 계단에 흩어진 물건, 오른쪽 탁자 밑의 책까지 찾아보세요. 엘 그레코는 젊은 시절 이 장면을 그리면서 화면 구석구석을 물건과 동물로 채웠습니다. 예수의 손을 따라가던 눈이 바닥으로 내려오면, 그림 속 소란이 한층 실감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성전에서 소와 양,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하는 사람들을 보고, 채찍을 만들어 내보내며 돈을 쏟고 상을 뒤엎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도 이어집니다. (요한복음 2장 13~17절) [4]
이 초기 작품을 기억해두세요. 잠시 뒤에 볼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는 뜻밖의 얼굴들이 나타납니다.
02 성전 한구석에 화가들이 앉아 있다
다음은 미니애폴리스 미술관에 있는 《성전 정화》입니다. 비슷한 그림처럼 보여도 오른쪽 아래가 확 달라졌습니다. 남자 4명의 얼굴이 나란히 들어와 있습니다. [2] [5]

누군가는 몸을 돌려 옆 사람을 보고, 누군가는 관객 쪽을 바라봅니다. 다들 성전에서 벌어지는 소동보다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이지요. 이곳에 엘 그레코 시대의 화가들이 등장합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해설은 왼쪽부터 티치아노, 미켈란젤로, 줄리오 클로비오로 설명합니다. 네 번째 인물은 라파엘로일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마지막 얼굴의 이름은 확정해서 부르기 어렵습니다. [2]
성서 속 현장에 르네상스 화가들의 자리가 생긴 셈입니다. 오늘날 영화에 유명 감독이 잠깐 얼굴을 내미는 장면을 떠올리면 재미있습니다. 다만 이들은 엘 그레코가 붓으로 불러 모은 손님들입니다.
이제 초기 그림과 번갈아 보세요. 작은 동물과 그릇을 구경하던 자리에 사람의 얼굴이 들어오자, 그림을 읽는 재미도 달라집니다. ‘무엇이 있나’에서 ‘저 사람은 누구지’로 눈길이 바뀝니다.
03 세월이 흐르자, 화면이 사람들로 꽉 찼다
시간을 건너 1600년경의 그림을 보겠습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본입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의 몸이 화면을 훨씬 크게 차지합니다. [3]

첫 그림에서는 건물도 보고, 바닥도 보고, 작은 동물도 살필 여유가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팔과 어깨, 옷자락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구경하던 자리가 소동 가까이로 옮겨진 듯합니다.
예수 앞의 노란 옷을 입은 남자는 몸을 뒤로 젖힙니다. 그 뒤의 사람들도 줄줄이 밀려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른쪽 사람들은 서로 가까이 모여 있습니다. 양쪽의 움직임을 번갈아 보면, 그림의 중심에 선 예수의 동작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같은 장면을 다시 그리면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냈는지, 세 그림을 비교해 보세요. 작은 물건을 빼고 인물을 크게 그리는 것만으로도 그림의 분위기가 얼마나 바뀌는지 볼 수 있습니다.
04 벽에도 성서 이야기가 숨어 있다
런던 판본의 위쪽 벽을 보면 돌에 새긴 작은 장면이 2개 있습니다. 왼쪽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 오른쪽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입니다. [3]
왼쪽에서는 ‘쫓겨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벽과 바닥에서 겹칩니다. 오른쪽의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에 따르는 인물입니다. 미술관 해설은 이 두 부조를 죄와 순종이라는 의미로 읽습니다. 작은 벽 장식에도 화면 아래 사람들과 연결되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3]
아담과 하와의 추방: 창세기 3장 23~24절
아브라함과 이삭: 창세기 22장 1~14절
그림을 크게 열어 두 부조를 찾아보세요. 화면 가운데 소동에 눈길이 쏠리는 동안, 벽 위에서는 또 다른 성서 이야기가 조용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05 25파운드 4실링에 낙찰된 그림
이 런던 그림에는 경매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1877년 6월 30일, 크리스티 경매에서 25파운드 4실링에 팔렸습니다. 구매자는 존 찰스 로빈슨이었습니다. 그는 1895년 그림을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했습니다. [3]
지금 우리가 전체 이미지를 열어 볼 수 있는 작품 뒤에는, 그림을 사고 오래 간직하다 미술관에 내놓은 사람의 선택도 있습니다.
처음의 워싱턴 판본으로 돌아가면 작은 토끼가 다시 보입니다. 미니애폴리스 판본에는 화가들의 얼굴이, 런던 판본에는 크게 다가오는 사람들과 벽의 부조가 있습니다. 제목은 같아도 오래 볼수록 서로 다른 그림입니다.
자료와 이미지 출처
- 워싱턴 국립미술관 — 초기 《성전 정화》의 연대, 작품 설명과 전체 이미지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El Greco (1981) — 미니애폴리스 판본에 등장하는 화가들의 초상
- 런던 내셔널 갤러리 — 1600년경 판본의 벽면 부조와 소장 이력
- 성서: 요한복음 2장 13~17절 —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보내는 장면
-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 《성전 정화》 소장품 안내
이미지 출처는 각 그림 아래에 표시했습니다. 세 작품은 잘리지 않은 전체 화면이며, 화가 4명의 얼굴은 별도 부분 이미지입니다. 자료 확인: 2026년 10월 2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