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영상으로 먼저 만나기
영상에서는 1931년 《살의》의 도발적인 시작과 프랜시스 아일스의 정체를 만납니다. 여기서는 범인을 먼저 보여주는 이야기의 뒷무대로 가보겠습니다.
01 범인을 맞히면 상금? 한 작가는 반대로 해봤다
추리소설을 읽다가 범인을 맞히면 상금을 준다. 독자라면 솔깃할 만한 행사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작가 R. 오스틴 프리먼은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범인을 처음부터 알려주고, 범행까지 전부 보여주면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1912년 《노래하는 뼈》의 서문에는 그 실험이 시작된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프리먼은 한 인기 작가가 범인 맞히기 상금을 내건 일을 계기로 정반대 구상을 떠올렸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쓴 작품이 〈오스카 브로드스키 사건〉입니다. [1]
책의 목차도 재미있습니다. 이 단편의 앞부분은 ‘범죄가 이루어지는 과정’, 뒷부분은 ‘범죄를 밝혀내는 과정’으로 나뉩니다. 먼저 범인이 움직이고, 그다음 탐정 손다이크가 등장합니다. 독자는 현장을 보고 왔는데 탐정은 이제 수사를 시작합니다.
누가 범인인지 아는 독자와,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온 탐정.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탐정이 앞서 나갑니다. 내가 본 장면에서 대체 무엇을 더 찾아낸 걸까요?
프리먼이 노린 재미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넘긴 행동 하나가 나중에 증거가 됩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도, 그를 붙잡을 증거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찾아야 합니다. 이 실험은 후속 작품 요청으로 이어졌고, 책에는 같은 방식의 네 편과 전통적인 방식의 한 편이 함께 실렸습니다. [1]
02 《살의》를 읽을 때, 변명에 밑줄을 그어보세요
본편에서 만난 의사 비클리는 자기 사정을 설명하는 데 아주 열심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몰라주는지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를 오래 듣다 보면 독자의 판단도 슬쩍 흔들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작은 독서 놀이를 해보면 어떨까요. 비클리의 말이나 생각 중에서 자기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대목에 표시해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한 행동은 옆에 따로 적습니다. ‘본인이 설명한 자신’과 ‘행동으로 드러난 자신’을 두 줄로 놓고 읽는 방법입니다.
가령 어떤 인물이 약속을 어긴 뒤 ‘상대가 나를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봅시다. 이것은 읽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예입니다. 한 줄에는 ‘약속을 어겼다’, 다른 줄에는 ‘이해받지 못했다’가 남습니다. 두 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더 선명해집니다.
범인의 이름을 찾는 대신 변명이 자라는 과정을 보는 것이지요. 《살의》를 읽다가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순간에는, 그 두 줄을 한번 비교해 보세요. 이 글에서는 비클리의 마지막 운명은 남겨두겠습니다.
03 콜롬보는 TV에 정착하기 전에 무대에 섰다
낡은 코트에 흐트러진 머리. 콜롬보를 떠올리면 피터 포크의 얼굴부터 생각납니다. 그런데 그 형사를 만나러 극장에 가던 때도 있었습니다.
윌리엄 링크와 리처드 레빈슨의 연극 《Prescription: Murder》는 1962년 1월 20일 샌프란시스코 커런 극장에서 처음 공연됐습니다. 아래는 같은 해 3월 디트로이트 공연의 프로그램입니다. TV 시리즈로 익숙해진 인물이 종이 프로그램 속에 들어 있습니다. [2]

이 연극에서도 의사가 등장합니다. 정신과 의사와 그의 연인은 아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다른 사람 행세를 이용해 알리바이를 만들려 합니다. 콜롬보는 그 의사와 머리싸움을 벌입니다. 범행 계획을 아는 관객은 형사가 어떤 질문을 꺼낼지 기다리게 됩니다. [2]
등장인물 소개도 눈길을 끕니다. 의사는 세련되고 말쑥한 인물인 반면, 콜롬보는 어수룩하고 지나치게 미안해하는 듯한 형사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그 태도 아래에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영리함이 숨어 있습니다. 무대에 두 사람이 마주 서기만 해도 누가 누구를 얕보고 있는지 그림이 그려집니다. [2]
피터 포크가 등장하는 TV 영화 《Prescription: Murder》는 1968년에 나왔습니다. 이후 1971년부터 이어진 시리즈를 통해 그 형사는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 [3]
04 범인이 탐정의 말상대가 되는 기묘한 시간

콜롬보는 범인 앞에서 수사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별것 아닌 듯한 질문을 하고, 설명을 듣고, 다시 찾아옵니다. 방송박물관의 해설은 이 관계를 재미있게 짚습니다. 탐정 옆의 말상대 자리를, 정작 그가 쫓고 있는 범인이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3]
범인은 형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도 대답을 골라야 합니다. 아는 것이 너무 많아도 곤란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도 이상합니다. 시청자는 범행을 이미 봤으므로 그 대답의 위험을 알아챕니다.
이를테면 카드의 앞면을 관객에게만 보여준 채 두 사람이 게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입니다. 카드를 몰랐다면 결과가 궁금했겠지만, 알고 있으니 상대의 표정과 말 한마디에 더 신경이 쓰입니다. 이 비유처럼 범인을 미리 아는 추리물은 기다리는 즐거움을 만듭니다.
프리먼의 탐정은 평범한 흔적에서 뜻밖의 증거를 찾아내고, 콜롬보는 대화를 이어가며 상대의 설명을 시험합니다. 《살의》를 펼칠 때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물어보세요. ‘이 사람은 자기 행동을 어디까지 정당하다고 믿을까?’
첫 장에서 범인을 알았는데도 다음 장이 궁금하다면, 이야기는 이미 다른 곳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름 하나가 아니라, 그 사람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입니다.
자료와 출처
- R. Austin Freeman, 《The Singing Bone》 서문·목차(1912)
- Concord Theatricals, 《Prescription: Murder》 작품·공연 정보
- Television Academy, Columbo — 방송박물관 백과사전 해설
이미지별 출처와 이용 조건은 설명에 표시했습니다. 사진을 누르면 원본을 볼 수 있습니다. 독서 제안과 카드 게임 비유는 이 글의 해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