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영상으로 먼저 만나기
영상에서 여섯 남자와 그들의 일을 먼저 만나보세요. 아래에서는 장부 종이에 남은 습작, 고흐가 보낸 편지, 그림을 둘러싼 복원 논쟁을 따라갑니다.
01 명화의 밑그림은 장부 종이에
그림 맨 왼쪽에 앉은 노신사부터 보겠습니다. 넓은 모자 아래로 얼굴을 내민 사람은 야코프 판 론입니다. 다섯 검사관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의 모습을 그린 작은 습작이 남아 있습니다. 세로 19.5센티미터, 가로 16센티미터. 커다란 유화 앞에서는 놓치기 쉬운 몸의 기울기와 의자의 모양이, 이 작은 종이에서는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1]

재미있는 것은 종이의 출신입니다. 레이크스미술관의 연구 도록에 따르면, 렘브란트는 이 습작과 폴커르트 얀스의 습작을 회계 장부에서 나온 종이에 그렸습니다. 판 론의 습작은 뒷면에서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숫자를 적던 종이 한 장이 사람의 자세를 궁리하는 자리가 된 셈입니다. [1]
유화 속 판 론과 습작 속 판 론의 의자도 다릅니다. 종이 위에서는 소박한 의자에 앉아 있고, 완성작에서는 렘브란트가 다른 그림에도 그렸던 좀 더 장식적인 의자가 등장합니다. 얼굴과 손에는 몇 줄의 선을 쓰고, 옷의 그늘에는 갈색을 넓게 번지게 했습니다. 흰색으로 고친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1]
같은 사람을 두 번 보고 나면 습작의 빈 곳이 재미있어집니다. 무릎 아래는 어디까지 그렸는지, 의자 등받이는 몇 줄로 세웠는지, 얼굴의 어느 부분에서 펜을 멈췄는지. 완성된 유화에서는 한꺼번에 들어오던 인물이 여기서는 선 하나씩 나타납니다. 그림을 구상하던 렘브란트의 손을 조금 가까이에서 따라가는 기분입니다.
02 한 그림에 적힌 두 개의 연도
이 그림을 확대하면 뜻밖의 숫자가 보입니다. 오른쪽 위 벽에 적힌 것은 ‘1661’. 그런데 미술관의 작품 설명은 ‘1662년’이라고 합니다. 작품을 보고 연도를 확인한 사람이 오히려 헷갈리기 좋은 경우입니다.
화면 아래쪽, 탁자에 드리운 카펫에는 ‘Rembrandt f. 1662’라는 서명과 연도가 있습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전시 도록은 이 서명과 별도로, 오른쪽 위의 ‘1661’은 후대의 다른 손이 적었을 가능성을 표시합니다. 레이크스미술관의 소장품 기록은 위쪽 서명·연도를 진필이 아닌 것으로 분류합니다. [2] [3]
눈에 잘 띄는 글씨가 가장 믿을 만한 정보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카펫의 붉은색 사이에 들어간 작은 글씨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위쪽 숫자만 본 뒤 지나갔다면, 우리는 렘브란트보다 나중에 붓을 댄 사람의 말을 먼저 듣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페이지 맨 위 원화를 누르면 큰 이미지가 열립니다. 오른쪽 위 벽의 ‘1661’과 아래쪽 카펫의 ‘1662’를 차례로 찾아보세요. 미술관에서 작품 설명판을 읽는 일이 왜 필요한지, 숫자 두 개가 잘 보여줍니다.
03 고흐가 편지에 적어 보낸 손
1885년 10월, 빈센트 반 고흐가 암스테르담에 갔습니다. 화요일에 출발해 목요일에 돌아온 짧은 여행이었습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비용 때문에 방문을 거듭 미뤘지만, 다녀오기를 잘했다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미술관 말고는 거의 볼 시간이 없었다고도 적었습니다. [4]

그가 《직물상 조합의 이사들》에 붙인 평은 후했습니다. 완벽하며, 렘브란트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취지로 칭찬합니다. 감상은 곧 《유대인 신부》로 옮겨가고, 다시 다른 화가들의 색과 붓질로 이어집니다. 한 작품 앞에서 생긴 흥분이 다음 그림으로 번져가는 편지입니다. [4]
며칠 뒤 편지에서 고흐가 콕 집은 것은 손이었습니다.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가 그린 손에는 생기가 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요구하던 매끈한 마감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예로 이 그림의 손을 들었습니다. [5]

손 부분만 따로 보니 고흐가 왜 그 이야기를 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가운데 인물의 손바닥이 장부 옆으로 열려 있습니다. 옆 사람의 손은 펼친 종이 가까이에 놓여 있고, 가장 오른쪽 인물은 장갑을 쥐고 있습니다. 각 손을 이루는 밝고 어두운 붓자국은 거칠게 남아 있는데, 조금 물러서면 설명하고, 짚고, 움켜쥐는 동작이 또렷해집니다.
고흐는 잘된 붓질은 그대로 두는 태도에 끌렸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모든 주름과 손톱이 똑같이 선명한 화면에 익숙합니다. 그의 편지를 읽고 나면 이 그림 앞에서는 다른 것을 찾게 됩니다. 손이 얼마나 정교하게 묘사되었는지보다, 어느 순간부터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말입니다. [5]
그리고 한껏 고무된 편지의 끝에는 생활이 돌아옵니다. 고흐는 물감을 사야 하고 집세도 내야 한다며, 테오에게 돈을 더 보내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합니다. 거장의 그림을 보고 돌아온 감격과 다음 달 지출 걱정이 같은 편지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 대목에서 미술사의 유명한 이름이 잠시, 여행을 다녀온 형의 목소리로 들립니다. [4]
04 흰 칼라가 너무 하얗다는 항의
1932년에는 그림 속 사람들의 옷이 논쟁거리가 됐습니다. 흰색이 너무 희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1929년, 미술관은 들뜨는 물감층을 안정시키고 오래 쌓인 바니시의 윗부분을 덜어내는 처리를 했습니다. 노랗게 변한 표면이 옅어지자 익숙했던 색감도 달라 보였습니다. [6]

1932년 렘브란트 전시를 위해 작품을 동쪽 안뜰로 옮기면서 갈등이 커졌습니다. 관장 프레데릭 슈미트데헤너는 더 강한 빛과 주변 그림들의 누런 바니시가 색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화가들 사이에서는 그림의 조화가 깨졌다는 비판이 나왔고, 복원 과정에 자신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불만도 쌓였습니다. [6]
신문 《더 텔레흐라프》까지 가세했습니다. 이 그림이 망가졌는지를 묻는 기사를 내고 화가들의 답변을 모았습니다. 흰색을 다시 누그러뜨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관장은 색을 넣은 바니시로 그림을 덮는 데 반대했습니다. 2018년 레이크스미술관 학술지에 실린 연구는 당시 기록을 검토하며, 이 사건에서 복원 과정의 공개와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짚었습니다. [6]
이 대목을 읽고 다시 하얀 칼라를 보면, 우리가 명화의 색이라고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오래 눈에 익은 모습은 애착을 만듭니다. 그 모습이 바뀌었을 때 사람들은 그림을 잃었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여섯 남자는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그림 밖에서는 흰옷 하나를 두고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05 품질검사관들이 시가 상자에 들어간 이유
이 남자들을 미술관보다 가게에서 먼저 본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미국의 시가 브랜드 더치 마스터스(Dutch Masters)가 이 그림을 상표에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브랜드 소유사인 임페리얼 브랜즈의 공식 연혁은 출발점을 1912년으로 기록합니다. 당시 G. H. 존슨 시가 회사가 고른 그림이 바로 렘브란트의 《직물상 조합의 이사들》이었습니다. [7]

회사는 이들이 직물의 품질을 확인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을 선택 이유로 설명합니다. 명화 속 엄숙한 얼굴들이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인상과 연결된 것입니다. 직물을 살피던 17세기 암스테르담의 검사관들이, 20세기 미국에서는 담배 포장의 얼굴이 됐습니다. [7]
브랜드 이름도 그림을 보는 방식에 한몫합니다. ‘Dutch Masters’라고 하면 네덜란드의 거장들이 떠오릅니다. 여기에 사람들의 모자와 흰 칼라, 오래된 유화의 분위기가 더해집니다. 실제로 그린 화가는 한 명이고, 화면 속 주인공들은 품질검사관들인데, 이름과 그림이 한데 붙으면서 여러 겹의 연상이 생깁니다.
어떤 그림은 포스터가 되고, 어떤 얼굴은 상품의 상표가 됩니다. 이 경우에는 인물들이 생전에 맡았던 일까지 광고에 활용됐습니다. 미술관의 설명판을 읽으면 알게 될 직업이, 포장 상자에서는 믿음직한 표정으로 압축된 셈입니다. 그림 속에서 한꺼번에 우리를 바라보던 시선이 상점 진열대에서도 꽤 강하게 작용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06 그림의 주소는 바뀌어도, 도시에는 이름이 남았다
암스테르담 지도에서 ‘Staalstraat’를 찾아보면 그림 속 사람들이 일하던 곳의 흔적에 닿습니다. 시의 거리명 자료는 이 이름이 모퉁이 너머 흐룬뷔르흐발에 있던 스타알호프(Staalhof)에서 왔다고 설명합니다. 17·18세기 직물 제품을 감독하던 검사관들의 근거지였습니다. [8]
이 그림 역시 처음에는 직물 조합의 회관을 위해 주문되었습니다. 이후의 이동에는 정확한 날짜가 남아 있습니다. 1771년 11월 27일에는 암스테르담 시청의 미술품을 모아둔 방으로 옮겨졌고, 1808년 8월 15일부터는 레이크스미술관에 대여되었습니다. 오늘날 소장품 설명에 ‘암스테르담 시에서 대여’라고 적히는 이유입니다. [2]
유명한 그림을 보면 소유자도 당연히 그 미술관일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시가 소유하고 미술관이 맡아 보여주는 관계가 오래 이어져 왔습니다. 여섯 남자가 일하던 장소, 그들을 그린 작품을 소유한 도시, 우리가 작품을 만나는 전시실의 주소가 각각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 원화로 돌아가 얼굴 아래도 천천히 살펴보세요. 노신사가 앉은 의자에는 작은 종이 위에서 바뀐 모양이 있고, 카펫에는 오른쪽 위 벽과 다른 연도가 있습니다. 장부 곁의 손은 고흐를 설레게 했고, 흰 칼라는 훗날 사람들을 다투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닮은 옷을 입은 여섯 남자였는데, 한 부분씩 들여다볼수록 기억할 이야기가 늘어납니다.
자료와 이미지 출처
- 레이크스미술관 · Peter Schatborn, 2017 — 야코프 판 론 습작의 장부 종이, 크기, 의자와 기법
- 내셔널 갤러리 · Rembrandt: The Late Works 보충 도록, p.17, 작품 56 — 두 연도와 1771·1808년 이동 기록
- 레이크스미술관 · SK-C-6 — 작품 정보, 서명·연도, 소유 및 이용 조건
- 반 고흐의 편지 534 · 1885년 10월 10일경, 테오에게 — 암스테르담 방문, 작품 감상과 생활비 부탁
- 반 고흐의 편지 535 · 1885년 10월 13일경, 테오에게 — 손의 표현과 붓질에 관한 감상
- Esther van Duijn · The Restoration of Rembrandt’s Syndics, The Rijksmuseum Bulletin 66(4), 2018, pp.346–361 — 1929년 복원과 1932년 논쟁
- Imperial Brands · Our brands, Dutch Masters — 1912년 창립과 상표에 쓰인 그림
- 암스테르담 시 · Staalstraat 거리명 기록 — 스타알호프와 검사관들
회화·습작·전시장 사진은 레이크스미술관과 Wikimedia Commons의 Public domain·CC0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더치 마스터스 상품 사진의 출처는 Finck Cigar Company입니다. 각 이미지 아래에 원본 출처를 표시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