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영상으로 먼저 만나기
영상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먼저 만난 뒤, 아래 글에서는 그림의 주인과 이름이 바뀌고 복제화까지 여행을 떠난 사연을 따라갑니다.
01 이 그림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었던 시절
1883년 스웨덴 미술아카데미의 소장품 목록을 펼치면, 우리가 아는 이 그림이 낯선 이야기로 등장합니다. 얀 후스의 죽음에 복수하겠다는 추종자들의 맹세를 받는 얀 지슈카. 오늘날 붙어 있는 키빌리스의 이름과는 전혀 다른 설명입니다. 아카데미는 1891년 네덜란드의 문서 연구자가 암스테르담 시청과의 관계를 찾아냈다고 소개합니다. 이듬해 목록에는 로마에 맞서도록 동포들을 독려하는 키빌리스가 등장합니다. [1]
같은 탁자, 같은 얼굴, 같은 칼인데 제목을 바꾸자 사람들의 사연이 통째로 달라집니다. 그림에는 인물의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굴만 보고 알아낼 수 있는 것과 문서를 통해 알게 되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간격이 있습니다.
한번 화면의 제목을 가리고 보세요. 사람들은 무엇을 약속하는 중일까요. 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도 있고, 누군가의 죽음에 복수를 다짐할 수도 있고, 지금의 지배자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칼을 모으는 동작은 강렬하지만, 그 동작만으로 사건의 날짜와 이름까지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 글에서 따라갈 것은 바로 그 이름표 바깥의 이야기입니다. 시청을 떠난 그림 앞에 어떤 사람들이 섰는지, 누가 돈을 내고 누가 물려받았는지, 그림을 살리려던 손이 무엇을 바꾸었는지. 렘브란트가 붓을 놓은 뒤에도 그림에는 여러 사람의 시간이 계속 쌓였습니다.
02 경매 목록의 17번, 가격은 60길더
1734년 8월 10일, 암스테르담의 한 경매.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 이력 자료에는 이 작품이 17번 물건으로 나오고, 니콜라스 콜이 60길더에 샀다고 적혀 있습니다. 경매의 설명은 옛 바타비족과 키빌리스의 연회를 가리킵니다. 훗날 작품의 주제가 혼동되기 전, 이 기록에는 원래 이야기의 실마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2]
지금의 명성을 떠올리면 먼저 가격에 눈이 갑니다. 당시 돈의 구매력과 작품 거래의 조건을 따져야 하므로, 오늘의 원화로 바꾸어 ‘얼마짜리 헐값’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더 흥미로운 것은 거대한 공공 주문작이 어느 시점에는 번호와 가격을 가진 개인의 물건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시청의 벽에 걸릴 자리를 전제로 만들어진 그림이 새 주인을 기다리는 경매 목록에 들어간 것입니다.
같은 도록은 콜의 아내 소피아 그릴, 그리고 안나 요한나 그릴과 남편 헨리크 빌헬름 페일로 이어지는 상속 관계를 정리합니다. 다만 1734년 전후의 세부 소장 경로에 관한 일부 재구성에는 추정이 많다고 주석을 붙입니다. 그림이 어느 배에 실려 어느 날 항구를 떠났는지까지 한 줄로 이어지는 여행 일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2]
미술관의 ‘소장 이력’은 이런 빈칸을 가진 기록입니다. 경매 날짜는 선명한데 그 사이의 이동은 흐릿합니다. 어떤 이름 뒤에는 배우자가, 또 다른 이름 뒤에는 상속인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의 취향으로 시작된 소장이 가족의 재산이 되고, 다음 세대의 결정에 따라 전혀 다른 장소로 옮겨갑니다. 그림은 가만히 있는데 주소록이 길어집니다.
03 그림을 건넨 사람들의 얼굴

소장 이력에 나오는 이름들을 초상화 속 얼굴로 만나면 이야기가 조금 가까워집니다. 로슬린의 이 가족화에는 어머니 안나 요한나 그릴과 아들 아돌프 울리크, 딸 안나 요한나가 등장합니다. 어머니와 딸의 이름이 같아 자료를 읽을 때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기증한 인물은 페일과 결혼한 딸입니다. [4]
이 가족은 화가들과도 가까이 지냈습니다. 스웨덴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로슬린의 1767년 작품에는 화가 자신과 아내 마리 쉬잔 지루, 그리고 지루가 그리고 있는 페일의 초상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사람 셋을 한 줄로 세우는 대신, 한 사람을 그림 속의 그림으로 등장시킨 구성입니다. 미술관은 이 작품을 페일과 부부 사이의 우정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설명합니다. [4]
가족화에도 비슷한 장치가 있습니다. 세 사람 뒤쪽의 초상은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가족 곁에 남겨 둡니다. 살아 있는 사람과 먼저 떠난 사람이 한 화면에 머무는 방식입니다. 집 안에 걸린 그림은 가족의 기억을 보관하는 물건이기도 했습니다. [4]
1798년 안나 요한나가 렘브란트의 작품을 미술아카데미에 기증한 것은 세상을 떠난 남편을 기리는 일이었습니다. 작품의 공식 소장 기록에도 그 뜻이 남아 있습니다. [2] 그림 속에서는 사람들이 공동의 행동을 약속하고, 그림 바깥에서는 한 여성이 한 사람을 기억할 방법을 정합니다. 반란의 장면에 애도의 사연이 겹치는 대목입니다.
04 왕이 찾아온 날, 벽 뒤에 걸려 있던 렘브란트

이번에는 사람들 뒤쪽의 벽을 먼저 보세요. 엘리아스 마르틴이 그린 아카데미의 실내에는 렘브란트의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한 점의 명화가 당시에는 학생과 손님들이 드나드는 방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런 ‘그림이 들어 있는 그림’은 옛 전시 공간을 상상하게 해 주는 좋은 자료입니다.
예테보리 미술관의 연구 간행물은 이 작품이 1780년 무렵부터 1785년까지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이 접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렘브란트의 빛을 향한 관심은 스웨덴 화가들의 작업에도 이어졌습니다. 같은 글은 칼 구스타브 필로의 《구스타브 3세의 대관식》에서 그 영향을 살핍니다. [3]
구스타브 3세도 이 그림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미술관 자료에 따르면 왕은 작품을 아카데미에 두기에는 너무 중요하다고 여겨 1785년 왕궁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3] 암스테르담 시청에서 자리를 얻지 못했던 그림이 스웨덴에서는 왕의 눈에 들어 궁전으로 이동합니다. 같은 화면을 두고 어떤 공간이 어울리는지 판단하는 사람이 달라진 셈입니다.
마르틴의 그림을 다시 보면 렘브란트 작품만 크게 잘라 보고 싶어집니다. 잠시 그대로 두고 주변을 함께 보아도 좋습니다. 사람들이 서 있는 위치, 위쪽에 걸린 그림의 높이, 방 안에 놓인 다른 물건들. 지금의 전시실에서 한 점씩 감상하는 모습과는 다른 거리감이 생깁니다. 명화의 역사는 그 앞에 서 있던 관객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05 칼 한 자루를 둘러싼 복원의 의문
스웨덴 미술아카데미는 마르틴의 실내 그림과 오늘의 렘브란트 작품 사이에서 칼 한 자루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복원가 에리크 할블라드가 원래 천에서 물감층을 옮겨 새 천에 붙였던 작업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칼이 손상을 가리기 위한 보필이었을 수 있다는 설명은 이 기관이 소개하는 가설입니다. [1]
물감이 올라간 천을 바꾼다니, 액자를 교체하는 일보다 훨씬 아슬아슬하게 들립니다. 오래된 유화에서는 색이 붙어 있는 표면과 그것을 받치는 바탕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눈에 그림으로 보이는 것은 빛과 얼굴이지만, 실제 작품은 무게와 두께를 가진 재료이기도 합니다.
이 대목을 알고 나면 칼날을 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누가 그 칼을 들고 있는지 손을 따라가 보고, 마르틴이 그린 작은 화면에서는 어떻게 보이는지 비교하게 됩니다. 다만 작은 실내화 속 묘사와 큰 원작의 차이만으로 특정 부분의 제작자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간격을 문서와 물질 분석으로 좁히는 것이 연구의 몫입니다.
그림 앞에서 흔히 떠올리는 이름은 렘브란트 하나입니다. 여기에 그림을 옮긴 사람, 보관한 사람, 표면을 고친 사람의 손을 더하면 작품이 살아남은 시간이 보입니다. 지금의 화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17세기 화가의 선택과 후대의 흔적을 구별해야 하는 질문도 늘어납니다.
06 맹세 직전, 키빌리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이제 탁자에 앉은 사람에게 돌아가 봅시다. 타키투스가 전하는 키빌리스의 사정은 한밤의 모임보다 먼저 시작됩니다. 그는 체포되어 네로에게 보내졌고, 갈바 때 풀려났지만 비텔리우스 시기에 다시 목숨을 위협받았습니다. 파울루스는 반란 혐의로 처형되었습니다. 타키투스는 그 혐의를 거짓이라고 서술합니다. [5]
민심을 흔든 직접적인 계기 가운데 하나는 징집이었습니다. 《역사》 제4권은 관리들이 늙거나 몸이 약한 사람까지 골라 놓고 돈을 받고 빼주는 등 권한을 악용했다고 적습니다. 아들과 형제가 끌려가는 일, 면제를 얻기 위해 돈을 내는 일이 정치적인 분노와 연결됩니다. 키빌리스는 연회를 마련해 사람들을 모으고 이런 불만을 행동으로 묶으려 했습니다. [5]
그는 로마 내부의 권력 다툼도 계산했습니다. 타키투스의 서술에서 키빌리스는 베스파시아누스를 돕는다는 명분을 활용합니다. 탁자에 모인 사람들이 곧바로 한 마음으로 독립 전쟁에 나섰다는 도식보다 훨씬 복잡한 정세입니다. 적이 내 편의 적과 싸우고 있을 때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을지 가늠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5]
레이크스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바타비족은 원래 로마의 동맹이었고, 반란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훨씬 뒤 네덜란드의 저술가들이 스페인에 맞선 투쟁을 설명하면서 이 옛 이야기를 다시 불러냈습니다. [6] 후대가 기념하는 장면은 승리의 결과보다 행동을 결심한 순간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림의 시간은 유난히 팽팽합니다. 아직 결과를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그림 속의 누구도 후대의 교과서나 미술관 설명을 읽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결말을 알고 탁자를 바라보고, 그들은 결말을 모른 채 칼을 내밉니다. 그 시차가 이 장면을 오래 보게 만듭니다.
07 거대한 그림의 단서가 작은 종이 뒤에

이 작품의 원래 모습을 알려주는 스케치에는 뜻밖의 이력이 있습니다. 미술아카데미는 그것이 1661년 10월 장례 초대장의 뒷면에 그려졌다고 소개합니다. [1] 한쪽 면에서는 장례를 알리고, 다른 쪽 면에서는 거대한 공공 회화의 구상이 자란 셈입니다.
내셔널 갤러리 도록에 기록된 종이의 크기는 19.6 × 18센티미터입니다. [2] 화면 속 아치의 높이를 따라 눈을 올리다 이 수치를 떠올리면 묘한 크기 차이가 느껴집니다. 손에 들고 들여다볼 만한 종이 안에, 높은 벽을 채울 공간이 접혀 있습니다.
스케치는 완성된 그림을 축소해 놓은 물건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여기서는 작품에서 사라진 부분을 생각하게 하는 자료가 됩니다. 넓은 공간이 남아 있는 작은 종이와, 그 공간을 잃은 큰 유화가 서로의 빈 곳을 설명합니다. 두 이미지를 나란히 떠올리면 크기와 정보의 양이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실감하게 됩니다.
그림을 연구하는 일은 때로 이런 작은 물건에 매달립니다. 한 장의 종이, 목록의 이름 하나, 방 안을 그린 그림 구석의 도판. 처음에는 주변부처럼 보이던 자료가 어느 순간 작품의 중심으로 들어옵니다. 잃어버린 화면을 다시 볼 수는 없어도, 어디가 비었는지는 더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08 복제화마저 제자리를 찾아 여행했다
1926년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는 스웨덴 화가 칼 슈베르트에게 이 그림의 복제화를 주문했습니다. 새 함부르크 도서관의 열람·강연 공간에 걸기 위해서였습니다. 작업이 늦어지자 완성을 재촉하는 편지를 보냈고, 마침내 도착한 결과에는 만족해 약속한 보수 외에 보너스까지 지급했습니다. [7]
바르부르크에게 이 장면은 연구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옛 이야기와 몸짓이 시대를 건너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지 살폈고, 렘브란트의 화면과 안토니오 템페스타의 판화를 함께 생각했습니다. 그림을 멀리 있는 미술관에서만 보는 대신,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공간 가까이에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7]
그런데 복제화도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습니다. 연구소의 이력 안내에 따르면 공간 문제로 바르부르크의 옆집 사저로 옮겨졌습니다. 도서관이 1933년 런던으로 이전할 때에는 함부르크에 남았습니다. 작품을 물려받은 아들 막스 아돌프는 1934년 네덜란드로 이주하며 복제화를 레이크스미술관에 맡겼습니다. [8]
1956년에야 그림은 런던으로 건너왔습니다.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 보관되다가 1958년 바르부르크 연구소의 새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8] 원작의 이동을 따라 읽다가 복제화의 주소까지 추적하게 됩니다. 함부르크, 암스테르담, 런던. 한 장면을 곁에 두려는 마음이 또 하나의 소장 이력을 만든 것입니다.
원작 앞에서 느꼈던 인상을 다른 곳에서도 다시 마주하고 싶다는 마음은 낯설지 않습니다. 그림엽서를 책상에 세워 두거나, 도록을 펼쳐 두거나, 화면에 작품을 저장하는 일도 그와 닿아 있습니다. 바르부르크의 경우에는 그 마음이 원작 크기의 유화가 되어 여러 도시를 건넜습니다.
09 그림은 남고, 그 앞의 사람들이 바뀐다
처음 이 그림을 보면 빛나는 탁자와 칼을 든 남자들이 보입니다. 이제 그 주변에 다른 얼굴들을 놓아볼 수 있습니다. 경매 목록을 들여다보던 구매자, 남편을 기억하며 기증을 결정한 안나 요한나, 아카데미를 방문한 왕, 화면의 바탕을 손본 복원가, 복제화를 기다리며 편지를 쓰던 학자.
그림 속 사람들은 한순간에 멈추어 있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누군가는 역사적 교훈을 찾았고, 누군가는 빛을 배웠고, 누군가는 가족을 기억할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같은 물건을 두고 생긴 여러 관계가 작품의 이동 경로에 포개져 있습니다.
제목을 가리고 그림을 보았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세요. 이제는 화면 밖에 붙어 있는 이름과 날짜도 조금 다르게 읽힐 겁니다. 작은 설명판의 ‘1798년 기증’ 뒤에는 가족이 있고, 오래된 목록의 잘못된 제목 뒤에는 알아내려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음에 미술관에서 그림 하나를 오래 보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소장 이력도 살펴보세요. 작품이 완성된 뒤 시작된 이야기가 그 몇 줄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자료와 이미지 출처
- 스웨덴 왕립미술아카데미 — 작품의 옛 제목, 스케치와 복원 이력
- 내셔널 갤러리, Rembrandt: The Late Works 보충 도록, p.15 — 경매·상속·기증 기록
- 예테보리 미술관, Skiascope 8, pp.42–43 — 구스타브 3세와 스웨덴 화가들
- Nationalmuseum, NM 7141 — 로슬린·지루 부부와 페일, 그릴 가족 초상화
- 타키투스, 《역사》 제4권 13–15절 — 체포, 징집과 맹세
- 레이크스미술관 — 키빌리스와 바타비족의 반란
- Claudia Wedepohl, 바르부르크의 렘브란트 복제화, 2024 — 주문과 연구 배경
- 바르부르크 연구소 — 복제화의 함부르크·암스테르담·런던 이동
소장 경로의 빈칸과 복원에 관한 가설은 본문에서 구분했습니다. 작품을 바라보는 감상과 해석은 이 글의 서술입니다. 각 이미지 아래에 제작자·출처·이용 조건을 표시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