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영상으로 먼저 만나기
크리스티가 벨기에인 탐정을 떠올린 배경에는 제1차 세계대전 중 고향 토키로 온 난민들이 있었습니다. 영상에서는 그 만남과 첫 소설의 탄생을 다룹니다.[1]
이제 그 탐정의 조금 엉뚱한 모습을 만나보겠습니다. 이웃집에 호박을 던지고, 영화에 나가서는 콧수염을 잃고, 의뢰인에게 나이 때문에 퇴짜까지 맞는 푸아로입니다.
01 옆집 남자가 호박을 던졌다
정원에서 잡초를 뽑는데, 귀 옆으로 커다란 호박이 날아옵니다.
1926년 소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의 초반입니다. 의사 셰퍼드는 새로 이사 온 외국인이 영 궁금합니다. 콧수염을 보니 은퇴한 이발사 같기도 합니다. 누나 캐럴라인은 이발사라면 머리가 곱슬거려야 한다며 그 추측에 반대합니다. 두 사람의 수사는 시작부터 조금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호박이 발치에 떨어진 뒤 담장 너머로 나타난 사람은 바로 그 이웃입니다. 그는 연신 사과합니다. 몇 달째 호박을 길러왔는데, 갑자기 화가 치밀어 가장 큰 것을 집어 던졌다는 겁니다. 은퇴하고 한가롭게 살아보려던 푸아로는 벌써 예전의 바쁜 날들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2]
더 우스운 것은 그다음 고백입니다. 푸아로는 멀리 아르헨티나에 있는 친구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친구의 순진함도, 자신의 솜씨로 그를 놀라게 하던 즐거움도 그립습니다. 누군가 그리워 죽겠다는 말 속에 자기 자랑을 슬쩍 끼워 넣는 솜씨라니요.
함께 지낸 사람이 멀리 가면 답답하다고 타박하던 버릇까지 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푸아로의 고백이 얄미우면서도 다정하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대화가 끝날 무렵 그는 셰퍼드에게 호박 하나를 선물합니다. 첫 호박은 귀 옆으로 날아왔고, 두 번째는 정중하게 건네집니다. 첫 만남이 이 정도라면 이웃으로 지내는 동안 심심할 일은 없겠네요.[2]
02 영국 안에 있던 작은 벨기에
푸아로가 외국인이라는 설정은 당대 독자들에게 지금보다 훨씬 익숙한 풍경이었을 겁니다. 크리스티가 난민들을 만난 토키에서 멀리 북쪽으로 가면, 영국 땅에 벨기에인의 마을이 통째로 들어선 곳도 있었습니다. 더럼 지역 버틀리의 엘리자베스빌입니다.
1916년 군수공장 옆에 조성된 이곳은 벨기에 왕비 엘리자베트의 이름을 땄습니다. 마을 안에서는 벨기에 법을 따르고 벨기에 헌병이 질서를 지켰습니다. 프랑스어와 플라망어가 들리고, 화폐로는 벨기에 프랑이 쓰였습니다. 영국에 피란 왔는데 담장 안에서는 고향 말과 돈을 쓰는 생활이 이어진 셈입니다.[3]

사진 속 아이들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를 맞고 있습니다. 문가에는 어머니가 서 있고, 뒤편으로 나무로 지은 집들이 보입니다. ‘난민’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는 이동하는 사람들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이 사진에는 일을 마치고 돌아올 집과, 그 시간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습니다.
한때 주민이 약 6천 명에 이르렀던 마을에는 학교와 병원, 상점, 영화관도 있었습니다. 다만 주변 영국 마을과 자유롭게 섞여 사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울타리와 출입증 제도가 있었고, 바깥 주민들과의 교류는 제한적이었습니다.[3]
이런 생활을 알고 나면 푸아로가 자기 국적을 유난히 정확하게 말하는 장면도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주변 사람에게는 그저 ‘외국인 이웃’이어도, 본인에게는 떠나온 나라와 언어가 있습니다. 낯선 이름을 자꾸 잘못 불리는 사람의 심정도, 이름을 잘못 부르는 쪽의 무심함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03 첫 영화의 푸아로에게는 콧수염이 없었다
푸아로를 그려보라고 하면 어디부터 그릴까요. 달걀 모양의 머리, 말끔한 옷차림, 그리고 아마도 콧수염일 겁니다. 그런데 영화 속 첫 푸아로는 면도를 깨끗이 한 얼굴로 등장했습니다.
1931년 영화 《알리바이》에서 푸아로를 연기한 사람은 오스틴 트레버입니다. 제작진은 그를 젊고 잘생긴 탐정으로 내세웠습니다. 트레버는 같은 해 《블랙 커피》, 1934년 《에지웨어 경의 죽음》에서도 푸아로를 맡았습니다. 오늘의 독자라면 분장실에서 가장 중요한 소품을 빠뜨렸다고 여길 얼굴이, 당시에는 영화의 푸아로였던 것입니다.[4]
이름을 자막에서 지워놓으면 바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같은 인물도 독자의 머릿속 모습과 제작자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꽤 다를 수 있습니다. 특히 여러 작품을 거치며 친숙해진 인물은 얼굴의 작은 특징 하나만 달라져도 낯설어집니다.
1974년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는 앨버트 피니가 푸아로가 됐습니다. 이때는 콧수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마음에 들어 했던 크리스티에게도 아쉬운 점이 남았습니다. 자기가 쓴 푸아로의 콧수염은 영국에서 가장 훌륭해야 하는데, 영화에서는 그만큼 멋지지 않았다는 겁니다.[4]
팬들이 캐릭터의 모습을 놓고 까다롭게 구는 데에는 선례가 있었네요. 작가 자신이 콧수염의 품격을 꼼꼼히 따지고 있었습니다. 범인을 정확히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푸아로가 완성되지 않았던 겁니다.
04 의뢰인이 얼굴을 보더니 돌아가 버렸다
푸아로의 자존심은 소설 안에서도 종종 시험을 받습니다. 1966년에 나온 《세 번째 여자》에서는 아침부터 난처한 일을 겪습니다. 브리오슈와 핫초콜릿을 먹는 시간에 젊은 여자가 찾아옵니다. 사람을 죽인 것 같다는 말을 하러 온 손님입니다.
탐정이라면 얼른 사정을 물어봐야 할 순간입니다. 하지만 손님은 푸아로를 보더니 너무 늙었다며 돌아가 버립니다. 명성을 듣고 찾아왔어도 눈앞의 노인을 보고는 도움을 받을 수 없겠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푸아로는 충격을 받고, 동시에 이 이상한 방문이 궁금해집니다. 그는 추리소설가 아리아드네 올리버와 함께 여자를 찾기 시작합니다.[5]
이 출발이 재미있는 이유는 푸아로가 늘 하던 방식대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조차 얻지 못해서입니다. 방 안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명하기도 전에 손님이 문밖으로 나가버렸으니까요. 이름을 듣고 감탄해 주던 사람들과는 첫 만남부터 다릅니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에서 독자가 처음 만났을 때도 푸아로는 이미 은퇴한 경찰관이었습니다. 수십 년 뒤의 작품에서도 계속 사건을 해결하다 보니, 작가는 그 나이 자체를 난처한 첫인사로 써먹습니다. 이 대목만큼은 푸아로의 유명세보다 의뢰인의 당황스러운 솔직함이 먼저 기억에 남습니다.[1]
05 푸아로의 첫 사건을 쓰던 날들
첫 추리소설을 구상하던 크리스티는 집에서 자꾸 딴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말을 걸어도 대답이 시원치 않았고, 뜨개질의 코를 잘못 뜨거나 편지 봉투에 엉뚱한 주소를 적기도 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사건의 앞뒤를 맞추느라 바빴던 겁니다.[6]
처음부터 원고가 술술 써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비교적 분명했지만, 그 사이를 채우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반전과 단서를 너무 많이 넣었다는 생각에 덜어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독자를 능숙하게 속이게 될 작가도 첫 작품에서는 무엇을 남길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원고를 절반쯤 썼을 무렵 지친 딸에게 어머니는 휴가 동안 글쓰기에 집중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크리스티는 다트무어의 호텔로 갔습니다. 오전에는 손이 아플 만큼 글을 쓰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황야를 오래 걸었습니다.
그 산책이 재미있습니다. 걸으면서 다음에 쓸 장면의 대사를 혼자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이 인물이 됐다가 저 인물이 됐다가 하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옆에서 마주친 사람에게는 혼잣말을 하는 젊은 여자였겠지만, 작가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사람이 말을 주고받고 있었겠지요.[6]
출판을 준비하면서는 사건을 설명하는 장소도 달라졌습니다. 처음 원고에서 푸아로는 법정에서 해답을 밝혔습니다. 수정본에서는 용의자들을 한 방에 모아놓고 설명합니다. 훗날 크리스티 소설에서 익숙해질 장면이 첫 책을 고쳐 쓰는 과정에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6]
다음에 푸아로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보다 앞서 다트무어를 혼자 걷던 크리스티도 떠올려보세요.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번갈아 내보며, 이 탐정을 독자 앞에 어떻게 등장시킬지 궁리하던 시절입니다.
자료와 이미지 출처
- 애거서 크리스티 공식 사이트 — 푸아로의 탄생과 벨기에 난민
- 애거서 크리스티,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원문 3장 — 호박을 기르는 이웃
- Imperial War Museums — 영국의 벨기에 난민과 엘리자베스빌
- 애거서 크리스티 공식 사이트 — 무대와 영화의 역대 푸아로
- 애거서 크리스티 공식 사이트 — 《세 번째 여자》, 2016년 11월 작품 해설
- 애거서 크리스티 공식 사이트 —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을 쓰고 고친 과정
원작의 장면과 출간·영화화 기록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각 사진의 원본과 이용 조건은 이미지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